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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제31회 국제예술심포지엄 등록일 2002-10-15 l 조회수 4779 |
작성자 관리자
우리나라 연극(뮤지컬)발전과 국제교류증진을 위하여 2002.10.15일 예술원대회의실에서 <일본 뮤지컬의 현황>(Senda Akihiko교수), <한국뮤지컬의 위상변화>(정중헌 논설위원) 등의 주제로 각계인사 3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성황리에 제31회 국제예술심포지엄을 마쳤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연극애호가 여러분께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동 주제발표원고 전문을 게재하오니 많은 활용있으시기 바랍니다.


<일본 뮤지컬의 현황>

(연극평론가, 시즈오까문화예술대학 교수)

뮤지컬 상연이 활발한 일본
현재 일본에서는 많은 뮤지컬이 상연되어 많은 관객을 모으고 있다. 특히 동경과 오사카에서 많은 공연이 상연되고 있다. 한 예로 2002년10월 현재 동경에 한하여 상연 현황을 살펴보자.
극단 사계(四季/시끼)는 1998년 12월이래, 일본어판 브로드웨이 뮤지컬 『라이온킹』을 무기한 장기상연하고 있다. 또한 사계는 댄스 뮤지컬 『콘텍트』(Contact)도 동경에서 상연한다.(3월28일~11월10일)
대형 흥행회사인 토호(東寶)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태어난 뮤지컬『모짜르트!』의 일본어판을 상연중이다.(10월, 닛세이극장. 12월, 테이꼬꾸극장)
신 국립극장 소극장에서는 스테판 손다힘 작곡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태평양 서곡』(Pacific Overtures)이 미야모또 아몬(宮本亞門) 연출로 번역ㆍ상연되고 있다. 이 뮤지컬은 2000년 동경에서 상연되었으며 금년 여름에는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도 상연돼 찬사를 받았다.
이 밖에 브로드웨이 뮤지컬 『풋 루스』(Footloose)가 아카사까 ACT 시어터에서 재상연중이다. 미야모또 아몬이 각본ㆍ연출ㆍ안무를 맡은 오리지날 뮤지컬『아이 갓 마아만』(I GOT MERMAN)도 10월25일부터 하꾸힌깐극장에서 재상연된다.


또한 여성 연기자만으로 구성된 타까라즈까 가극단(寶塚歌劇團)은 뮤지컬『봉황전』과 레뷰『더 쇼 스톱퍼』를 동경 타까라즈까 극장에서 상연중이다.


이같이 동경에서는 뮤지컬이 융성하고 있다. 극단 사계의 『라이온킹』과 같이 이미 3년 반 이상 롱런을 계속하는 작품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 같은 상연작 대부분이 브로드웨이를 비롯한 외국작품으로, 일본에서 태어난 오리지날 작품은 실로 적다는 것이다. 위에서 소개한 작품 중에 오리지날 작품은『아이 갓 마아만』과 타까라즈까 가극단의 작품뿐이다. 뮤지컬의 융성이라고 하지만 어디까지나 외국의 히트작에 의존한 뮤지컬 인기인 것이다.








토호가 선도한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상연


일본의 뮤지컬 상연에는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앞선 역사가 있다. 1914년에 결성된 타까라즈까 가극단도 그 역사 중 하나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번역ㆍ상연된 것은 1963년 토호(東寶)가 키꾸따 카즈오(菊田一夫)의 연출로 일본에서 초연한 『마이 페어 레이디』였다. 이 공연의 성공으로 인해 이후 토호가 중심이 되어 많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일본어판이 상연되게 된다.『노 스트링스』(1964년 초연),『노력하지 않고 출세하는 방법』(64년),『애니여 총을 들어라』(64년),『사운드 오브 뮤직』(65년),『왕과 나』(65년),『키스 미 케이트』(66년),『남태평양』(66년) 등이 상연된 작품들이다.


그 중에서도 영화스타이자 베테랑 배우인 모리시게 히사야(森繁久彌)가 주연한 『지붕위의 바이올린』(67년, 일본초연)은 호평을 얻어 여러 번 재상연을 거듭해 1986년까지 900회나 무대에 올랐다.


또 가부끼 스타인 마츠모또 고시로(松本幸四郞)가 주연한 『라 만차의 사나이』(1969년, 일본초연)도 높은 반응을 불러일으켜 2002년 8월에는 초연이래 통산 상연회수가 1000회에 달했다. 가부끼의 양식성을 살린 마츠모또 고시로의 연기가 일본관객에게 강한 친근감을 주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도입에 있어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토호였다. 이것은 스타 시스템에 의한 상업연극으로서의 뮤지컬 상연이다.


1980년대 이후로도 토호는 런던의 뮤지컬인 『레 미제라블』(1987년, 일본초연), 『미스 사이공』(1992년, 일본초연)등을 상연하였다. 특히 『레 미제라블』은 계속해서 재상연 되는 인기작품이다. 또 빈에서 시작된 뮤지컬 『엘리자베트』(2000년)와 같은 히트작도 나왔다.(이 작품은 토호에 앞서 타까라즈까 가극단이 96년 일본에서 초연하였다.)





극단 사계에 의한 앙상블형 뮤지컬 상연


한편 1980년대 이후 뮤지컬을 축으로 급성장을 계속해 현재는 라이벌인 토호를 완전히 추월한 것이 연출가 아사리 게이따(淺利慶太)가 이끄는 극단 사계(四季/시끼)이다. 사계는 1953년 창립되어 「신고전주의」를 내건 신극 극단으로, 초기에는 한결같이 아누이, 지로두 등의 프랑스 희곡을 상연하였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아사리 게이따는 뮤지컬 분야에 진출했다. 먼저 어린이용 뮤지컬에서 연기, 댄스, 가창력 기술을 연마하여 1963년부터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상연하게 된다. 특히『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1973년, 일본초연), 『웨스트사이드 스토리』(74년, 초연), 『코러스 라인』(79년, 초연)의 성공으로 관객을 늘렸다.


획기적이었던 것은 1983년 사계가 일본에서 초연한『캣츠』였다. 이 작품으로 사계는 그 당시까지 일본에선 불가능하다고 여겨져 왔던 1년 간의 장기흥행을 동경에서 성공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돌파구가 되어 사계는 80년대 후반 이후 뮤지컬 장기공연을 동경 이외인 삿뽀로, 나고야, 오사카, 후꾸오까에서도 감행하였다. 『오페라의 유령』(1988년, 일본초연)이라는 인기작품이 레파토리에 첨가된 것도 이러한 확대노선을 유리하게 했다.    


사계의 뮤지컬이 토호 제작의 뮤지컬과 다른 것은 기본적으로 스타 시스템을 취하지 않고 스타를 부정하는 신극적인 앙상블주의를 취하고 있는 점이다.『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웨스트사이드 스토리』,『코러스라인』,『캣츠』등 사계가 상연에 성공한 작품들이 모두 빅 스타를 필요로 하는 뮤지컬이 아니라, 앙상블로 보여주는 작품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때문에 사계의 무대에서 인기가 높아진 배우들은 자신들을 스타 취급하지 않는 사계를 나와 라이벌인 토호 뮤지컬에서 활약하게 되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1990년대가 되자 사계는 디즈니 뮤지컬인 『미녀와 야수』(95년, 일본초연)와 『라이온킹』(98년, 일본초연)의 일본 상연권도 얻게된다. 95년에 동경에서 막을 올린 『미녀와 야수』는 2년 4개월 간의 일본 장기상연기록을 세웠으나 98년에 개막한 『라이온킹』은 이를 상회하여 이미 3년 가까운 롱런을 계속하고 있다.


1998년 극단 사계는 동경에 대형, 중형 2개의 전용극장을 지닌 사계극장을 개장했다. 사계는 동경 이외에도 나고야, 오사카, 후꾸오까에 전용극장을 가지고 있다. 아사리 게이따의 경영전략에 의해 일본의 대도시 4개를 연결하는 사계전용극장 네트워크가 만들어진 것이다.


2001년, 1년 간 사계가 전국에서 상연한 공연수는 2,218 무대, 관객동원수 220만명, 매상은 약 184억 엔에 달한다. 경기침체가 계속되는 일본에서 이 숫자는 획기적인 것이다.


2002년 12월, 사계는 대형 광고대행사인「덴츠(電通)」와 제휴하여 동경에 또 다른 전용극장을 오픈한다.


그러나 사계의 뮤지컬 레파토리는 그 대부분이 구미의 작품들이다. 2000년에는 사계의 뮤지컬 매상고 중 해외작품에 의한 수입이 86[%]을 차지했다. 사계는 연간 약 30억 엔이나 저작권료를 해외에 지불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사계는 최근 오리지날 뮤지컬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사계에는 이미 『이향란(李香蘭)』(1991년 초연), 『이국의 언덕』(2001년 초연)등의 오리지날 뮤지컬이 있다. 그 중에서도 『이향란』은 중국, 싱가폴에서도 상연된 의욕적인 작품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외국의 인기 뮤지컬에 필적할만한 우수 히트작은 없다. 이를 위해 사계는 각본에 대한 보다 철저한 연마를 해야할 필요가 있다.





오리지날 뮤지컬의 흐름


이와 같은 수입초과로 수출작품이 아직은 적은 일본 뮤지컬계이지만, 최근에는 오리지날 뮤지컬 제작도 활발해지고 있다.


첫째 흐름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영향을 받은 브레히트형 음악극의 흐름이다.


195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브레히트 작품이 활발히 번역ㆍ상연되었다. 그 영향으로 브로드웨이를 본보기로 삼지 않는 브레히트적인 사회비판성이 강한 음악극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후꾸다 요시유끼(福田善之)의『사나다 후운로꾸(眞田風雲錄)』(1962년, 초연)은 그 선구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현대일본을 대표하는 극작가중 한사람인 이노우에 히사시(井上ひさし)의 『일본인의 배꼽』(1969년),『오모떼우라 갠나이 카에루갓센(表裏源內蛙合戰)(70년)도 이 계통의 뛰어난 음악극이다. 이노우에 히사시의 최근작『꿈이 찢겨진 곳』(2001년)도 브레히트 노래를 개사한 곡이 듬뿍 담긴 음악극이었다.


1960년대부터 70년대에 걸쳐 분위기가 고조되었던 일본의 소극장운동에서는 사또 마고또(佐藤信)의 『희극 쇼와의 세계』3부작(1972~79년)이 프레히트계의 음악극이었다. 이 연작 중『아베사다의 개』(75년)는 수작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극장운동에서 등장한 극작가, 사이또 렌(齋藤憐)이 각본을 쓴 『상하이 반스킹』(79년)은 매우 뛰어난 음악극으로, 이미 400회 이상 상연되고 있는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상해에 살았던 일본 재즈뮤지션의 운명을 탄탄한 구성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배우들이 직접 악기를 가지고 재즈를 연주하는 스타일이 인기를 모았다.


둘째 흐름은 그 외의 오리지날 뮤지컬 흐름이다.


연출가 미야모또 아몬의 『아이 갓 마아만』(1987년 초연)은 여배우 3명, 피아노 2대라는 간소한 설정으로, 미국의 유명한 뮤지컬 여배우 에셀 마아만의 생애를 그린 애환 넘치는 작품이다. 소재는 미국 것이지만 이 평전형 뮤지컬의 구성은 뛰어나다. 1958년 동경에서 태어나 댄서에서 연출가, 안무가로 전신한 미야코또 아몬은 어린 시절부터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양분으로 자라난 세대이다.


오리지날 뮤지컬을 전문으로 상연하는 동경의 극단도 등장하고 있다. 그 대표격은 옹가꾸자(音樂座)(1988년 창립)와 극단 후루사또 캰바라(1983년 창립)이다. 옹가꾸자는 유명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뮤지컬을 만들고 있다. 대표작은 나츠메 소우세끼(夏目漱石)의 명작소설 『봇쨩(도련님)』을 원작으로 하는 『아이 러브 봇쨩』(1993년 초연).


한편 후루사또 캰바라는 극단 전속작가인 이시즈까 가츠히꼬(石塚克彦) 작ㆍ연출로 일관되게 일본의 농촌과 기업사회 등, 일본 현실에 기초한 리얼한 감각을 지닌 뮤지컬을 만들고 있다. 그러나 사회를 비판하기 위한 뮤지컬이 아니며, 작품 대부분은 관객에게 힘을 북돋아 주는 해피엔드로 끝난다. 대표작은 『아버지와 며느리』(83년), 『형』(85년), 『셀러리맨의 금메달』(92년)등.


최근에는 연극과 텔레비전 양쪽에서 활약하는 희극작가인 미따니 고끼(三谷幸喜)가 뮤지컬 제작에 나서 『오케삐!(오케스트라 비트)』(2000년), 『오늘밤 그대--YOU ARE THE TOP』(2002년)과 같은 음악극도 만들고 있다.


이와 같이 일본의 오리지날 뮤지컬은 점차 그 수도 증가하고 내용도 다채로와 지고 있다.


그러나 일본 오리지날 뮤지컬의 가장 큰 결함은 각본이 약하다는 것이다. 이 약점을 극복하고, 또한 일본전통연극이나 전통음악과의 연결을 강화한다면 언젠가 세계 뮤지컬 시장에서 통용되는 뛰어난 일본 뮤지컬이 탄생하는 일도 꿈만은 아닐 것이다.


<끝>







"한국 뮤지컬의 位相 변화"


- 1990년대 뮤지컬 감상 캠페인과 뮤지컬 賞을 중심으로





鄭 重 憲 (조선일보 논설위원)








■ 2002년 10월


- 한국뮤지컬의 현주소





  중앙 일간지들은 '뮤지컬 열풍'이 올 여름 공연계를 휩쓸었다고 보도했다. 문화일보는 공연기획사 CMI의 '레 미제라블'로 시작해 7월부터 3개월 동안 20여 개의 뮤지컬 작품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고 전했다. 지난 6월 공연기획사 제미로의 '오페라의 유령'이 우리나라 공연사상 처음으로 140억여원의 매출을 올리면서 뮤지컬 열풍이 불었다는 분석이다.


  '명성황후'의 연출가 윤호진씨도 경향신문 기고에서 '뮤지컬 태풍경보'를 울렸다. 열악하다는 공연예술계에서 유독 뮤지컬 장르는 동시에 수십 편이 올라가는 진풍경을 이루면서 브로드웨이 못지 않은 왕성함을 과시하고 있다는 것은 불과 8년전만 해도 상상도 못했던 일이라는 게 윤씨의 술회다. 그는 올해 공연작품 수와 총 관객 수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2배이상 늘었다는 보도도 인용했다.


  양적 성장만이 아니라 뮤지컬 작품이 다양해지고 완성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은 '뮤지컬 전성기'를 예감하게 만드는 희망의 증거라고 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 낯익은 고전부터 '레 미제라블' '오페라의 유령' 같은 명작 뿐 아니라, '델라구아다' '렌트' 같이 최신작이라 불리는 작품도 한국 관객을 찾았다는 것이다.


  경향신문은 하반기에도 '포비든 플래닛' '블루사이공' '몽유도원도' 등 제작비 5억원 이상의 중대형 뮤지컬이 줄을 이을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여기에 'UFO' '델라구아다'와 같은 뮤지컬 퍼포먼스까지 가세해 뮤지컬 열풍을 달구고 있다는 것이다.


  이 보도는 뮤지컬의 산업화 조짐도 보인다고 진단했다. 그동안 '산업'이라고 부르기에는 초보단계에 머물렀던 뮤지컬계에 최근 뚜렷한 변화가 일고 있다며  지난해 연말부터 올해7월까지 공연된 '오페라의 유령'을 예로 들었다. 7개월 간 연속 공연된 이 뮤지컬의 유료관객은 총24만여 명으로 뮤지컬 관람층이 두터워졌다며 올 여름 많은 수의 뮤지컬이 한꺼번에 내 걸린 것도 이런 확신에서 비롯됐다고 분석했다.


  그 결과 뮤지컬산업에 부정적이었던 전문투자사까지 서서히 눈을 돌리기 시작해 일신창투와 한솔창투는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 각각 5억원씩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이 밖에 연 1백억원의 유용투자금을 확보한 뮤지컬·콘서트 전문투자회사 SJ 엔터테인먼트가 지난해 11월 설립됐으며, '블루사이공'은 2억원 가량의 네티즌 펀딩을 처음 실시한 점도 투자가능성으로 꼽았다. 공연업계로서는 최초로 '난타'의 PMC코리아가 코스닥 등록을 앞두고 있음도 특기했다. '오페라의 유령'이 성공한 이후로 가능성이 있다면 뮤지컬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하려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2002년 현재의 한국 뮤지컬은 외형상 호황기를 맞고 있다. 공연성과는 예외로 하더라도 한 시즌 20여편의 뮤지컬 작품들이 공연되고, 직수입 뮤지컬부터 우리 손으로 만든 해외명작과 창작뮤지컬 등 다양한 장르로 확산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현상이다. 단일 공연 외형이 1백억원을 넘어섬으로써 뮤지컬의 산업화 가능성도 내다볼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공연의 질, 창작 뮤지컬의 개발, 뮤지컬 전용극장의 확보 등 난제가 가로놓여있기는 하지만 한국 뮤지컬은 지난 10여년동안 그 어느 장르보다도 비약적인 발전을 해온 것이 사실이다.


  연출가 윤호진 씨는 "우리 뮤지컬 역량은 뉴욕 본토에 비해 크게 뒤질 것이 없다"는 자신감을 표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한국 뮤지컬은 시장규모 면에서 일본에 현저히 뒤지고 있으며, 해외 진출 또한 의욕만큼 결과를 기대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판단이 지배적이다.     지난 10여년을 돌아보면 한국 뮤지컬의 성장속도는 놀라울 정도다. 배우들의 기량이 향상됐을 뿐 아니라 무대미술, 조명, 음향 등 기술면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무엇보다 뮤지컬 관람인구의 저변이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수준도 매우 높아졌다. 아직 궤도에 올랐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획과 마케팅 역량도 크게 향상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일부 거품도 있겠지만 뮤지컬이란 장르는 공연계에 확실한 뿌리를 내리고 관객들과 친숙하게 만나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다.














■ 1990년 이전


   - 초창기 한국 뮤지컬 상황





  두산 세계백과사전은 한국 뮤지컬의 효시로, 1950년대말 드라마센터에서 개막한 '포기와 베스'를 꼽았다. 1961년에 '예그린악단'이 설립되어 '삼천만의 향연'(1962)과 '흥부와 놀부'(1963)를 공연함으로써 일반에게 알려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인들에게 뮤지컬의 형식과 재미를 안겨준 작품은 예그린악단이 1966년에 공연한 '살짜기 옵서예'였다. 패티 김 등이 출연한 '살짜기 옵서예'의 성공에 힘입어 '꽃님이 꽃님이 꽃님이'(1967), '바다여 말하라'(1971) 등이 공연됐지만 창작뮤지컬의 열기는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뮤지컬의 불씨를 되살린 극단은 상업극을 표방하고 나선 현대극장이었다. 샹송을 소재로한 '빠담 빠담 빠담'(1979)이 관객을 모으자 어린이 뮤지컬 '피터팬'(1979)을 선보여 관심을 끌었다. 현대극장은 브로드웨이 뮤지컬인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1980)와 '사운드 오브 뮤직'(1981)을 자체 제작해 뮤지컬의 초석을 다졌다. 83년 극단 민중에 의해 초연된 '아가씨와 건달들'은 극단 대중과 광장 등에 의해 번갈아 공연되고 합동 공연까지 하는 등 최근까지 반복되면서 많은 관객을 모아 뮤지컬 인구의 저변확대에 획기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 뮤지컬이 본격 체제를 갖춘 것은 1987년 잠실 롯데월드 개장기념으로 공연된 '매직 인 더 미러'였다고 볼 수 있다. 롯데는 뮤지컬 공연이 가능한 롯데월드 예술극장을 마련하고 전문 기획자와 전속 뮤지컬 극단을 확보해 뮤지컬의 기업화를 표방하고 나섰다. 본 고장 연기자들을 가세시킨 이 공연은 관객의 인기를 모았을 뿐 아니라 남경주, 최정원 등 뮤지컬 스타를 발굴하는 등용문 역할도 했다. 뮤지컬 전용극장으로 자리매김한 롯데월드 예술극장은 '아가씨와 건달들'(1990), '가스펠'(1990), '웨스트사이드 스토리'(!991), '돈키호테'(1992), '레 미제라블'(1993) 등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우리 배우와 스태프진으로 구성해 뮤지컬 활성화의 산실 역할을 했다. 그러나 93년 경영진이 경제논리를 앞세워 예술극장을 다른 용도로 전용해 버리면서 모처럼 불길이 타올랐던 뮤지컬 붐은 사그러들고 말았다.


  이상에서 보듯이 60년대 뮤지컬은 발아기였고, 70년대말 상업극단이 태동하면서 반짝 인기를 모으다가 87년 롯데월드예술극장의 개관으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문 배우의 부족과 기량미숙, 기술 등 전문인력의 낙후, 제작비의 영세성과 기획력 부족 등 여건이 맞아떨어지지 못해 고전을 면치 못했다. 무엇보다 전문극장이 없어 지속적인 공연을 하기 어려웠고, 일반 무대에서 단기공연을 하다보니 채산을 맞추기가 힘들었다.


  한국의 공연예술은 태생적으로 홀로 서기가 힘든 분야지만 특히 뮤지컬은 누군가의 지원과 도움 없이는 자생하기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러나 정부의 지원은 기대하기 어려웠고 기업들의 협찬 역시 미미했다. 그나마 관객이 보아주어야 하는데 80년대 말까지만 해도 관객들의 뮤지컬에 대한 관심도가 낮은 형편이었다. 가장 대중적인 장르인 뮤지컬에 관객이 모이지 않는다면 뮤지컬이 생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 1990년대부터 2000년까지  


   -뮤지컬 보기운동과 뮤지컬 大賞





  1990년 또 하나의 스포츠 연예 전문지인 스포츠조선이 창간됐다. 당시 문화연예부장을 맡았던 필자는 타지와 차별화할 수 있는 문화사업으로 '청룡영화상 부활'과 '뮤지컬 보기운동'을 제안했다. 청룡영화상은 조선일보다 중단했던 영화상을 속개키로 한 것이지만 뮤지컬 보기 운동은 일찍이 예가 없었던 관객대상의 감상캠페인이었다.


  이 운동을 펴기로 한 첫째 목적은 독자들에게 보다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하고 공연예술쪽에 활력을 불어넣자는 것이었다. 독자들이 작품을 선택하고 이해를 도울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여 생생한 현장감을 제공하자는 취지였다. 87년 민주화 바람이 일고 88년 서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면서 문화예술계에도 규제가 풀리고 자유로운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연예술분야는 여전히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예술인들이 어렵게 작품을 무대에 올려도 공연장은 썰렁하기만 했다. 근본 원인은 연극이나 뮤지컬 등이 관객의 기대에 미칠만한 작품을 내놓지 못한데 있었지만 더 큰 이유는 TV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루평균 시청시간이 2시간을 넘고 국민 대다수가 여가시간의 대부분을 TV앞에서 소비하고 있는 상황에서 공연예술은 관객을 모으기가 쉽지 않았다. 뮤지컬보기 운동은 TV의 말초적인 프로그램에 중독된 시청자들을 TV앞에서 탈출시켜 광학적 체험이 아닌, 현장예술이 주는 생생한 아우라를 맛보게 하자는 것이었다.


  연극, 오페라, 무용, 음악 등 여러 공연장르 중에서 굳이 뮤지컬을 택한 것은 뮤지컬이 지닌 대중성 때문이었다. 춤과 노래, 연기가 어우러지는 뮤지컬은 타 장르에 비해 이해가 쉽고 재미를 안겨주는 게 특징이다.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이 편안하게 즐길 수 있는 장르가 뮤지컬이고, 대형공연과 장기공연의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도 뒷받침이 되었다.  그러나 신문의 캠페인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관객에게 정보를 제공할 수는 있어도 관객관리나 관람특전을 제공하기가 힘들다. 극단 측에도 마찬가지로 제작비를 지원하거나 공연의 질을 끌어올리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짜낸 아이디어가 공동주최였다. 뮤지컬 극단 측과 협의하여 신문사는 지상으로 공동 주최함으로써 사고(社告)와 기사를 내줌으로써 관객들을 극장으로 안내하는 형식이다.  


  뮤지컬 보기 운동이 출범한 배경에는 정진수, 손진책 씨등 연극인들의 지원이 있었다. 90년 어느 날 롯데월드예술극장에 모여 뮤지컬 활성화 방안을 논의하던 중 뮤지컬 보기 캠페인을 벌여보자는데 뜻을 모은 것이다 따라서 첫 테이프는 손진책이 연출한 극단 미추의 '영웅만들기'가 끊었고 두 번째 작품은 정진수 연출로 롯데월드 예술극장무대에 올린 '아가씨와 건달들'이었다. 첫 캠페인 공연을 '영웅만들기'로 택한 이유는 우리 정서를 담아낸 한국형 뮤지컬에 더 역점을 두려는 의지에서였다. '매직 인더 미러'에 의한 롯데월드 예술극장의 '아가씨와 건달들'은 흥행에 성공함으로써 뮤지컬보기 운동의 효과와 가능성을 밝게 해주었다.


  관객과 극단을 이어주는 매체서비스이자 문화예술 캠페인이라고 할 수 있는 뮤지컬 보기 운동은 90년 이후 최근까지 80년을 후원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참가 극단은 미추, 롯데월드예술극장, 서울예술단, 광장, 맥토, 대중, 현대극장, IMG, 판 뮤지컬컴퍼니, 로열씨어터, 가교, 신화, 서울시뮤지컬단, 자유, 서울창무극단, 신시, 환퍼포먼스. 학전, 서울뮤지컬컴퍼니, 서울발레시어터, 북악무대 등 전 뮤지컬 제작사가 망라돼 있다.


  캠페인 대상은 새로운 뮤지컬 형식을 추구한 작품, 전형적으로 관객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뮤지컬 쇼, 우리 전통의 연희양식을 현대적인 뮤지컬에 응용한 작품, 그리고 각종 이벤트 공연까지 다양하게 포함시켰다. 캠페인에 동참한 작품에 동원된 관객은 2000년까지 10년 동안 연인원 400만명(지방공연 제외)이 넘는 것으로 집계됐다. 10만명 이상을 모은 히트작품으로는 롯데월드예술극장의 '웨스트사이드 스토리'와 '돈키호테', 극단 대중의 '넌센스', 서울뮤지컬컴퍼니의 '쇼 코미디'등이 꼽힌다. 극단 가교의 '번지 없는 주막', '홍도야 우지마라', '굳세어라 금순아', '울고 넘는 박달재', '비내리는 고모령' 등 악극도 중장년 관객층을 대거 끌어들여 한국적인 뮤지컬의 한 형식의 자리매김을 했다.


  뮤지컬 보기 운동을 통해 이색공연과 형식탈회 등의 시도가 이루어진 점도 특기할 만 하다. 이색 공연으로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사운드 오브 뮤직' 초청을 비롯 러시아 뮤지컬 '유논과 아노스'의 한·러 합작을 꼽을 수 있다. 98년 초연된 서울뮤지컬컴퍼니의 '하드락 카페'는 국내 최초로 심야공연을 시도하는 등 형식에 도전했고, 서울시뮤지컬단은 '한 여름밤의 꿈'을 야외에서 공연해 뮤지컬의 지평을 넓혔다.





- 뮤지컬 대상


  뮤지컬 보기 운동으로 성과를 거둔 스포츠 조선은 96년 국내 최초로 '한국뮤지컬 대상'을 제정해 뮤지컬 활성화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다른 장르에는 여러 상이 있지만 뮤지컬 분야에는 전문적인 상이 없던 차에 뮤지컬 대상이 만들어져 종사자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었고 관객들에게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주었다.


  시상내역은 최우수작품상과 베스트외국뮤지컬상 등 작품상을 비롯해 남녀주연, 조연, 신인상 등 연기자들을 발굴하고 격려하는 개인상에 특히 비중을 두었다. 또한 연출상을 비롯해 뮤지컬 진흥에 절대적인 극본상, 음악상, 안무상, 무대미술의상상, 기술상도 망라됐다. 뮤지컬의 특성을 살린 앙상블상과 인기스타상, 뮤지컬 발전에 공이 많거나 기획력이 탁월한 개인이나 단체에 시상하는 특별상도 마련해 이들을 기림으로써 뮤지컬 전분야의 육성과 활력을 꾀한 점이 특징이다.


  뮤지컬 대상은 공연예술의 특성을 살려 시상식 자체를 공연으로 꾸며 관객들의 호응을 얻었으며 뮤지컬인들의 축제마당으로 자리잡아 나갔다. 특히 2000년 3월에는 뮤지컬보기 운동 10주년 기념축제로 '아이러브 뮤지컬'이란 타이틀의 라이브 빅쇼를 마련하여 세종문화회관 대강당을 가득메운 관객들을 열광시켰다.


그러나 창작 뮤지컬을 활성화하려는 상의 취지가 열악한 제작환경으로 인해 위축된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명성황후'등 창작뮤지컬이 국내에서 호평으로 받으며 상을 휩쓴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뮤지컬 대상이 시행됨으로써 한해 뮤지컬 공연을 결산하고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아낌없는 격려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는 자체가 뮤지컬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뮤지컬 보기 운동을 통한 붐 조성과, 뮤지컬 상을 통한 뮤지컬인들의 사기양양, 그리고 뮤지컬 스타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축제공연이 한국 뮤지컬에 얼마만큼 신선한 자극을 주었는지는 앞으로 분석 평가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 10년의 성과


   - 거둔 것과 과제들


  뮤지컬보기 운동과 뮤지컬 상이 한국 뮤지컬 발전에 어떻게 얼마만큼 기여했느냐를 분석하기란 쉬운 작업이 아니다. 하지만 한국 뮤지컬 성장사에 '일조'를 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의 한파를 겪는 등 어려운 예술풍토 속에서 한국 뮤지컬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만큼 성장했다는 것은 전적으로 뮤지컬 인들과 뮤지컬을 사랑해준 관객들의 공이다. 그러나 한 신문사의 뮤지컬 감상 캠페인과 뮤지컬 상이 그 같은 성취를 꾀하는데 작은 힘이라도 되었다면 그것 자체가 평가할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정부의 보조나 기업의 지원과는 또 다른 차원의 예술진흥이고 순수 민간차원의 협업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난 10여년간 지속된 뮤지컬 보기운동과 뮤지컬상이 성장기 한국뮤지컬의 위상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가시적인 성과만이라도 훑어보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닐 것이다. 다만 자료가 축적되지 않아 분석적인 결과를 제시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현상만을 나열할 수밖에 없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 총체적 성과


  한국뮤지컬협회 김성원 이사장은 뮤지컬보기 운동에 대해 "국내 뮤지컬 계에 활력을 불어넣은 문화운동이었다"고 평가했다. 뮤지컬상을 수상하며 스타로 떠오른 배우 전수경씨는 "지난 10여년 계속된 뮤지컬보기 운동은 뮤지컬 공연에 관객을 모아주고 완성도를 높일 수 있도록 해준 뮤지컬계의 '좋은 친구'"라고 말했다. 그는 "우리문화예술계에서 뮤지컬이 새로운 장르로 대중의 사랑을 받게된 것은 불과 10여년전"이라며 "지금 이만큼 성장하기까지는 당시 기술적, 예술적 완성도가 부족했던 우리 뮤지컬을 믿고 세기말 대중들에게 감동과 활력을 불어 넣어주기 위해 시작한 뮤지컬보기 운동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했다.


  주관적인 면이 없지 않으나 두 뮤지컬인의 평을 종합하면 90년 스포츠조선에 의해 시작된 뮤지컬보기 운동은 한국 뮤지컬 전반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며, 관객을 모으고 완성도를 높이는데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관객과 뮤지컬무대의 가교역할을 함으로써 뮤지컬이 대중의 사랑을 받게 하고 그 힘으로 뮤지컬이 발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데 일조를 했다는 것이다.


  사실 90년 이전만 해도 국내에서 제작된 뮤지컬 공연은 초반에 관람하기가 두려울 정도였다. 출연진들이 오랜 연습 끝에 앙상블을 맞췄더라도 음향, 조명등 기술적인 수준이 낙후돼 불안하기 때문이었다. 특히 무선마이크를 사용한 경험이 적은데다 기재 또한 양질이 아니어서 배우들의 노래나 대사가 들리다 안 들리다 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조명도 프로그램 미숙과 용량부족 등의 이유로 분위기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무대미술분야도 전문인력이 적은데다 제작비가 열악해 극적인 효과를 제대로 살리기에는 역부족인 무대가 많았다.


  기술적인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다 보니 공연의 예술적 완성도도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뮤지컬보기 운동은 이런 난제들이 풀리지 않는 한 뮤지컬의 대중적 확산은 어렵다는 판단아래 기술상의 허점들을 집중 지적하는 등 기술향상을 꾸준히 독려해왔다. 한편으로는 뮤지컬대상을 통해 전문인들을 격려하고 자극을 주는 양면작전으로 기술발전에 관심을 기울였다.


  10여년이 지난 현재 뮤지컬의 기술향상은 눈부실 정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뮤지컬보기 운동이나 뮤지컬대상이 밑거름이 되긴 했지만, 뮤지컬 환경개선과 뮤지컬인들의 노력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뮤지컬 환경의 개선은 전문극장의 등장을 꼽을 수 있다. 1994년 예술의전당에 오페라 극장이 개관함으로써 뮤지컬은 수준이 높은 전문공연장을 갖게 되었을 뿐아니라, 장기공연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뮤지컬보기 운동역시 롯데월드예술극장이 문을 닫은 후 주춤하다가 오페라극장에서 '아가씨와 건달들'을 공연하면서 새 활로를 찾게됐다. 동숭아트홀, 연강홀, 서울교육문화회관 등이 뮤지컬 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최근 강남의 LG아트센터 라는 최신 공연장이 마련됨으로써 '오페라의 유령'이 장기공연 될 수 있었으며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두 번째는 뮤지컬 전문극단과 프로덕션의 창립이 한국뮤지컬 활성화에 대들보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서울예술단과 서울시뮤지컬단에 이어 에이콤이 창단되고 CMI등 프로덕션이 잇달아 설립되면서 전문성을 갖추기 시작했다. 극단 가교와 신시가 악극은 물론 뮤지컬 전문극단으로 발전하면서 시장을 확대했고, PMC프로덕션과 제미로 등이 '난타'와 '오페라의 유령'등을 롱런하면서 기업화의 문턱에 다가섰다.




















  - 뮤지컬 전문배우의 등용문


  뮤지컬 배우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7년 롯데월드예술극장이 개관기념으로 공연한 '매직 인더 미러'에서 남경주, 최정원, 조남희 등 젊은이들의 기량을 발휘하면서 부터라고 할 수 있다. 96년 제1회 뮤지컬대상을 통해 주원성, 전수경 부부가 신인상을 타면서 기라성같은 배우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원로 윤복희, 김성원을 비롯해 윤석화, 김성녀, 송용태, 남경읍, 유희성, 이정화, 김성기, 허준호, 임춘길, 김법래, 김민수, 김정숙, 오정해, 류정한, 이지은, 곽은태, 김원정, 이태원, 이인철, 임선애, 오재익, 이혜경, 방정식, 고미경, 조정근, 김선영 등이 한국 뮤지컬을 한 단계 끌어올린 중추들이다. 김민기씨가 이끄는 학전은 '지하철1호선'등을 롱런하며 신인들의 등용문 역할을 해왔다. 뮤지컬이 대중의 각광을 받으면서 지망생들이 대거 늘어나 오디션장마다 100여명이 넘는 미래의 인재들이 몰리고 있는 것도 바람직한 현상이다.





   -기획자(프로듀서) 시스템 구축


  롯데월드 예술극장 개관당시 김용현씨가 전문기획자로 나선 이후 90년대에 PD시스템이 구축된 것도 뮤지컬 발전의 동인이었다. 94년 창단된 에이콤의 대표겸 연출자 윤호진씨는 창작 뮤지컬 '명성황후'의 국내 장기흥행 및 뉴욕과 런던 공연 성사로 한국 창작뮤지컬의 영역을 넓혔다. 김상렬(작고)의 뒤를 이어 극단 신시를 뮤지컬 전문단체로 끌어올린 박명성, '오페라의 유령'을 기획한 제미로의 설도윤, PMC의 송승환씨 등이 한국 뮤지컬계의 대표적인 프로듀서들이다. 이밖에 민중의 정진수, 학전의 김민기, 대중의 조 민, 광장의 문석봉, 맥토의 이종훈, 즐거운 사람들의 김병호, 미추의 박현숙, 서울예술단의 오정학 씨등과 정혜영, 이유리, 정명주, 최 호, 이양희, 윤미경, 박민선씨 등이 기획자로 활동하면서 국내 뮤지컬은 내실을 다지게 되었다.





   - 기술진들의 활약


  뮤지컬 대상 1∼6회를 통해 스태프 부문상을 수상한 전문인들도 한국뮤지컬을 업그레이드 시키는데 공헌한 주역들이다. 1회 때의 이종훈(연출), 오은희(극본), 서병구(안무), 김형석(작곡), 박동우(무대미술), 손진숙(분장), 2회 수상자인 윤호진(연출), 최귀섭(작곡), 김정숙(극본), 최연호(무대미술), 김현숙(의상) 등이 기반을 닦는데 앞장섰던 뮤지컬인 들이다. 3회는 배해일(연출), 김기영(음향), 최종혁(음악), 안애순(안무), 김영수(무대감독), 채경호(특수장치), 4회는 윤정섭(무대미술), 이상봉(조명), 최창권· 최귀섭부자(작곡)가 수상했다. 5회때는 박종선(연출), 정치용(음악), 변창순(의상), 이영주(기술감독), 구유진(분장), 최청자(안무), 김상렬(특별상·작고)등이 상을 받았다. 6회 수상자는 한진섭(연출), 테넥 바르탁·김대성(음악), 박일규(안무), 이태섭(무대미술), 김유선· 최형오(기술), 김민기· 김용현· 최주봉(특별상)이 수상했다.


  이상의 수상자 면면을 보면 이들이 있었기에 한국 뮤지컬이 발전할 수 있었고, 상이 있어 이들을 격려했기에 각 분야 전문가들이 더욱 정진할 수 있었음을 눈으로 읽게 해준다.





   - 다양한 뮤지컬 보급


  뮤지컬보기 운동은 국내 창작뮤지컬 활성화에 역점을 두고 출범했지만, 번역 뮤지컬,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뮤지컬, 악극, 창무극 등 다양한 형태를 보급함으로써 영역확대에도 기여한 측면이 있다. 다만 뮤지컬 상에서 악극과 창무극 등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점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 분야는 앞으로 독자적인 영역으로 발전시키는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직수입한 것은 국내 뮤지컬 발전에 영향을 주었고 관객의 수준을 높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 하다.








■ 2002년 이후


   - 한국뮤지컬의 과제





  첫째는 뮤지컬 전문극장의 확대다. 현재는 시설이나 규모면에서 관객을 만족시키고 극단의 채산성을 맞출 수 있는 극장이 절대 부족한 실정이다. 중극장, 대극장 규모의 뮤지컬 전문극장이 서울 강남북은 물론 수도권과 지방에 마련되어야 뮤지컬의 기업화, 전문화를 꾀할 수 있다.


  둘째는 창작뮤지컬의 개발이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직수입으로 관객의 눈이 높아져 웬만한 창작극으로는 관객을 만족시키기가 어렵다. 그러나 번역이든 오리지널이든 외국뮤지컬은 로열티를 물어야하고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한다. 따라서 영화와 마찬가지로 뮤지컬 분야 역시 우리 관객들의 정서에 맞는 창작뮤지컬을 개발하여 완성도를 높일 때 경쟁력을 갖게 되며 해외진출도 가능해진다.


  셋째는 인력의 전문화다. 창작뮤지컬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극본과 작곡과 안무가 삼위일체를 이뤄야하는 만큼 이 분야의 전문인력 양성이 시급한 과제다. 최근 뮤지컬 전문 학과가 생겨나는 것은 고무적인 현상이지만, 무대미술처럼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배양될 수 있는 인프라를 갖춰야 한다. 배우 역시 지망생은 늘지만 전문성을 높이는데 주력해야만 층을 두텁게 할 수 있다.


  넷째는 기업화이다. 런던이나 뉴욕처럼 뮤지컬전문 컴퍼니가 설립되고, 일본의 극단 사계(四季)같은 전문체계를 갖춰야만 뮤지컬이 기업화될 수 있다. 기업화는 곧 문화산업으로의 진입이며, 산업화되어야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다섯째는 중·소극장 중심의 뮤지컬이 보다 많이 실험되고 제작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뮤지컬 공연의 난립을 우려하나 이런 과정을 거쳐야 자생력이 더욱 공고해지고 뮤지컬 인력이 양성될 수 있으며, 관객들에게도 옥석을 가리는 심미안을 길러줄 수 있는 것이다.


  뮤지컬은 누구나 즐길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해 발전가능성이 매우 밝다. 그러나 자생력과 경쟁력을 갖고 기업화 산업화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인프라를 구축해 주어야 한다. 정부와 기업의 지원도 배가되어야 하지만 관객을 공연장으로 접근시키는 민간차원의 문화캠페인도 필요하다. 한 신문사의 뮤지컬보기 운동과 뮤지컬 상 운영이 지난 10여년동안 그 같은 역할을 담담해줌으로써 한국 뮤지컬은 신장속도를 빨리할 수 있었다고 본다. 앞으로 고객관리 차원에서 뮤지컬 회원을 관리하고 홍보에서 매표까지도 체계화하는 지원시스템이 가동된다면 뮤지컬은 21세기 공연예술의 총아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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